기다림은 평온이 아니라 고통의 인내다
얼마 전 건강검진 결과표를 받았다. 우울증 의심 소견과 함께 가까운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라는 권유가 적혀 있었다. 문진표를 작성할 때 몇 가지 항목에 체크를 하긴 했지만, 막상 활자로 인쇄된 결과를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내 생각엔 난 원래도 조금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 같기는 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유독 마음이 가라앉고 무기력한 건 다른 이유가 크다. 주식이 떨어져서 그렇다.
계좌를 열 때마다 찍혀 있는 파란색 숫자들이 결국 일상의 기분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특히 최근 반도체 주식의 급락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 글에서 반도체 주가가 크게 빠졌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겠다고 썼다. 당장 쓸 돈이 아니니 시간을 두고 버틸 수 있다고 담담하게 적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린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안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평온한 기다림이라기보다는 솔직히 고통을 꾹 눌러 참는 인내에 가까웠다. 시세창을 보지 않으려고 해도 손가락은 습관처럼 증권 앱을 켜고, 꺾여 내려간 차트를 확인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이렇게 온종일 주식 생각만 붙잡고 있으면 돈을 잃기 전에 사람의 멘탈부터 먼저 망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는 것도 결국 일상이 온전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주식에 쏠려 있던 마음을 억지로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쓰고 있다. 주식 창을 끄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으면,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계좌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야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나에게 그 딴생각의 도구는 책이었다.
첫 번째로 집어 든 책은 크리스 밀러의 《칩 워(Chip War)》였다. 주가가 폭락해서 속이 쓰린 마당에 역설적이게도 반도체 역사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지난 70년 동안 반도체 산업이 미국과 소련, 일본, 대만, 한국을 거치며 어떤 피 튀기는 기술 경쟁과 냉전, 그리고 얼마나 많은 폭락 사이클을 겪어왔는지를 읽다 보니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금 겪고 있는 급락도 반도체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주기적인 겨울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의 시세 등락에 일희일비하던 좁은 시야가 산업의 거대한 흐름으로 조금은 넓어졌다. 주식 창 대신 두꺼운 역사와 기술 이야기에 몰입하는 동안은 계좌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았다.
또 하나 곁에 두고 읽은 책은 모건 하우절의 《돈의 심리학》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투자의 본질을 이렇게 말한다. 가장 뛰어난 투자자는 가장 높은 수익률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시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라고. 복리의 기적은 천재적인 통찰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통을 견뎌낸 시간에서 나온다는 대목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피터 린치 역시 시장의 급락은 겨울의 눈보라처럼 피할 수 없는 일상이지만,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고 했다.
물론 책을 읽는다고 해서 통장 잔고가 늘어나거나 파란 계좌가 하루아침에 빨갛게 바뀌지는 않는다. 건강검진 결과지에 찍힌 우울증 소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병원 진료를 받아봐야 하나 고민스럽고, 장이 열리는 시간이 되면 마음 한구석이 다시 서늘해진다.
그래도 주식 창에서 눈을 떼고 하루를 살아간다. 밥을 챙겨 먹고, 산책을 하고, 책장을 넘기며 딴생각을 한다. 기다림은 원래 아픈 법이고, 그 아픔을 견디게 해줄 딴청이 있어야 비로소 오래 버틸 수 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면, 이렇게 견디다 보면 결국 봄은 온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도서는 크리스 밀러 저 《칩 워(Chip War)》(2022) 및 모건 하우절 저 《돈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Money)》(2020)입니다. 이전 글은 2026년 8월 25일 작성된 '반도체 호황인데 왜 내 계좌는 파란가'입니다.
이 글은 저자의 개인적인 투자 경험과 심리적 성찰을 담은 1인칭 수필입니다.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매도 권유나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건강검진 및 우울증 관련 서술은 개인의 체험일 뿐 의학적 소견을 대신하지 않으며, 심리적 어려움이 지속될 경우 전문의의 진료와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확인한 근거 4개 보기
- 사용자 글감 메모(2026-08-27, run-20260827-semiconductor-spring-essay-01 intake) · 2026-08-27 · 건강검진 우울증 진단 고백, 반도체 주식 폭락으로 인한 우울감, 기다림의 고통과 책을 통한 딴생각, 봄은 온다는 믿음
- 기존 승인 원고 art-20260825-semiconductor-essay-01 (반도체 호황인데 왜 내 계좌는 파란가) · 2026-08-25 ·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겠다는 저자의 이전 선택 서술
- 크리스 밀러 저 《칩 워 (Chip War)》(2022년 출간, 국내 번역본 2023년) · 2022-10-04 · 반도체 70년 기술 패권 경쟁과 호황·불황 사이클 역사 서술
- 모건 하우절 저 《돈의 심리학 (The Psychology of Money)》(2020년 출간) · 2020-09-08 · 투자의 본질로서의 생존(Survival) 및 복리와 인내의 가치 서술
이 글은 저자의 개인적인 투자 경험과 심리적 성찰을 담은 1인칭 수필입니다.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매도 권유나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건강검진 및 우울증 관련 서술은 개인의 체험일 뿐 의학적 소견을 대신하지 않으며, 심리적 어려움이 지속될 경우 전문의의 진료와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소개된 도서는 저자의 개인적인 독서 경험에 따른 추천이며 어떠한 경제적 대가나 출판사 후원 없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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